키아프 서울이 남긴 것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키아프 서울이 남긴 것

프리즈 서울과 최초로 공동 개최된 21번째 키아프 서울은 여러 가지 과제를 남기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국제적인 아트페어로서의 아쉬움과 가능성이 숨 가쁘게 교차되었던 페어에서의 순간들을 되짚어본다.

BAZAAR BY BAZAAR 2022.09.26
 
페레스프로젝트에서 만난 애드 미놀리티(Ad Minoliti)의 조각작품 〈Celeste〉(2022)와 회화작품 〈Native Daisies 1〉(2022).

페레스프로젝트에서 만난 애드 미놀리티(Ad Minoliti)의 조각작품 〈Celeste〉(2022)와 회화작품 〈Native Daisies 1〉(2022).

지난 9월 2일 키아프와 프리즈 아트페어의 VIP 오픈 날, 삼성동 코엑스로 향하는 택시 안.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 미술관과 전시 기관에서 오디오 가이드 녹음과 도슨트를 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아나운서가 사뭇 비장하게 코엑스의 동태를 살피는 나와 컬렉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뭐? 대기 줄 끝이 안 보인다고?” “안 되겠어요. 오크우드에서 내려서 일단 C홀로 가는 게 좋겠어요.” 지난 한 주 미술이 생산해낸 역대급 이벤트를 빠짐없이 경험하겠다는 욕망으로 매일 저녁 미술관과 갤러리, 클럽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느라 진이 빠진 몰골로 엄중한 임무를 수행하듯 현장에 있는 지인에게서 실시간 상황을 확인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놓칠 수 없었다. 관람객과 음식을 나눠 먹는 퍼포먼스로 유명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논현동의 호프집에서 치킨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일이, 아트선재센터에서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토크를 들을 일이 또 있겠느냐 말이다. “정작 본 게임은 하기도 전에 뻗을 지경이야.” 비타민 드링크를 건네며 컬렉터가 말했다.
전화로 들은 것처럼 코엑스 3층 ‘프리즈 서울’ 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같은 시각 1층 ‘키아프 서울’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사실 그와 같은 현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페어 개막 열흘 전에 열린 키아프, 프리즈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사실상 아트 바젤과 함께 세계 양대 아트페어인 프리즈와의 공동 개최에 따른 부담감은 없냐는 질문에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층을 달리해 같은 기간에 치르는 만큼 체급 차가 나겠지만 더 멀리 내다봤을 때 공동 개최의 선택이 국제 아트페어로서 키아프의 업그레이드를 견인할 것”이라는 취지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말대로 이집트 목조 석관, 마지막 위대한 플랑드르 세밀화 작가 사이먼 베닝이 제작한 채식필사본 기도서 낱장, 피카소 그림과 에곤 실레의 드로잉 수십 점을 본 후 리히터의 대형 회화를 바라보며 루이나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프리즈 서울에 비하면 키아프가 조금 민숭맨숭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었다. 썰렁하다 싶은 입구를 보자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공동 개최가 국내 화랑들에게 위협이 될 거란 우려를 의식해서 참가 갤러리 심사 기준을 한층 높이고 쾌적한 관람 환경을 위해 수익 감소를 각오하며 부스와 휴게 장소를 넓히는 등 다양한 시도를 아끼지 않은 키아프에서는 확실히 호젓한 감상이란 게 가능했다. “프리즈에서 수억 원대의 작품들과 인파에 치여 다니다가 여기 내려오니 ‘살’맛이 난다”는 한 컬렉터의 말에 수긍이 갔다.
 
페레스프로젝트에 연달아 걸린 파올로 살바도르와 도나 후앙카의 대형 회화작품.

페레스프로젝트에 연달아 걸린 파올로 살바도르와 도나 후앙카의 대형 회화작품.

아트페어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갤러리들의 절묘한 전략이 맞부딪치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악셀 베르부르트 솔로 부스를 통해 예외적으로 아트페어에 참가한 김수자 작가. 이번 페어를 위해 제작한 〈연역적 오브제〉 곁에서 포즈를 취했다.

악셀 베르부르트 솔로 부스를 통해 예외적으로 아트페어에 참가한 김수자 작가. 이번 페어를 위해 제작한 〈연역적 오브제〉 곁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수자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브라만다 돌과 보따리를 통합하면서 우리가 지구에 태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우주로서 육신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삶과 죽음의 여정을 시적으로 은유합니다. 
 
백아트에서 선보인 아트레이유 모니아의 수채화 작품 〈Stressfest Wasteland〉(2022)와 〈Awry Fantasy〉(2022).

백아트에서 선보인 아트레이유 모니아의 수채화 작품 〈Stressfest Wasteland〉(2022)와 〈Awry Fantasy〉(2022).

B홀로 들어가 도나 후앙카와 파올로 살바도르의 대형 회화가 여름날의 저녁 노을을 닮은 로맨틱한 색감으로 유혹하고 슈앙 리의 글로시하게 반짝이는 거대 휴대폰 케이스가 눈길을 사로잡는 페레스프로젝트 부스를 맞닥뜨리자 ‘저걸 사서 집에 걸어 놓고 매일 보고 싶다’는 종교적인 욕망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지난봄 신라호텔 지하 1층 아케이드에 서울 지점을 오픈한 베를린 거점의 갤러리 페레스프로젝트의 조은혜 디렉터에게 “프리즈에 나가고 싶지 않았냐”는 민감하고도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프리즈 런던에 참여했었기에 프리즈가 얼마나 좋은 페어인지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한국 미술계에 보다 더 긴밀하게 속하게 되었으니 키아프에 나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말의 고민 없이 지원했어요. 지난해 키아프에 나왔을 때 판매도, 사무국 직원들과의 합도 좋았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지난 20년간의 노하우가 쌓여 있는 키아프를 선택하는 것이 시행착오가 덜하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결정은 영리한 선택이었음이 입증되었는데 키아프의 폐막 보도자료에서 설립자 하비에르 페레스는 “이번 키아프 서울은 지금까지 참여한 에디션 중 최고”였다며 “페루 작가 파올로 살바도르가 한국의 한 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을 포함하여 레베카 애크로이드, 라파 실바레스 등 소속 작가들의 작품이 개인 및 기관 소장품으로 대거 판매됐다”고 밝혔다.
아트페어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갤러리들의 절묘한 전략이 맞부딪치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이번 키아프&프리즈 공동 개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전략으로는 동시 참가를 들고 싶다.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에 동시에 참가한 12개의 갤러리(한국 갤러리 8곳, 외국 갤러리 4곳)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스를 보여준 건 갤러리현대와 악셀 베르부르트였다. 갤러리현대는 그리스 유물부터 피카소 같은 거장의 작품까지 다루는 프리즈 마스터스와 키아프를 선택했는데, 마스터스에서는 정신성을 상징하는 영험한 오브제인 ‘돌’을 재료로 한 박현기, 곽인식, 이승택 3인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의 작품을, 키아프에서는 올해 하반기 갤러리현대에서의 개인전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앞둔 김민정, 강익중, 박민준 등의 신작을 프리뷰 형식으로 선보였다. 갤러리현대 강남 스페이스에서 9월 24일까지 개인전 «새로운! 지금! 좋은!»을 통해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이는 케니 샤프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의 조각 연작 6점이 부스 입구에서 친근하게 관람객을 맞았다.
 
GOP에서 선보인 정윤경 작가의 〈Finger Spell〉 시리즈.

GOP에서 선보인 정윤경 작가의 〈Finger Spell〉 시리즈.

예술품과 골동품 컬렉터이자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악셀과 그의 아들 보리스가 이끄는 벨기에 갤러리 악셀 베르부르트는 처음으로 한국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갤러리 오너가 동양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일찍이 일본 구타이 그룹 작가들이나 한국 단색화 작가들을 소개해온 갤러리다. 악셀 베르부르트는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는 정창섭의 단색화와 권대섭의 달항아리, 이우환과 폴 세자르 엘뤼의 그림 등을 어우러지게 배치해 동양철학에 관심 많은 서양인 컬렉터의 기품 있는 집처럼 꾸미고, 키아프에서는 김수자의 솔로 부스를 선보였다. 김수자 작가의 시그너처 모티프인 보따리들을 따라 이주, 가난, 폭력, 추방된 자아와 같은 심오하거나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대표작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마침 김수자 작가가 부스에 나타났다. “페어에 잘 안 나가는 편인데 이번에 악셀 베르부르트에서 솔로쇼를 하자고 해서 맥락을 지닌 전시를 꾸린다는 생각으로 저의 작품들을 큐레이팅 해보았어요. 키아프 서울을 위해 제작한 신작과 저에게 중요한 작품들을 함께 선보이는 기회를 갖게 돼서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트레이드마크인 곱게 빗어 넘겨 가지런히 묶은 머리에 화이트 셔츠 차림인 작가는 신작이자 장소 특정적인 설치작업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 곁에서 소란스러운 페어장의 공기를 모두 흡수한 것처럼 차분했다. 샘물처럼 깨끗한 거울 위에 공중부양하는 반타 블랙 원형 조각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브라만다 돌(우주의 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하늘색 먼지 떨이로 수시로 바닥의 거울을 닦는 핸들러와 마찬가지로 피트된 블랙 수트 차림인 아티스트 리에종 샌더 보티어에 따르면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스톤’은 작가 자신의 존재라고 볼 수 있으며 탄생과 죽음의 개념을 암시한다. “인도의 전통 의식에서는 돌을 거울이 될 때까지 닦아내는 행위가 있습니다. 김수자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브라만다 돌과 보따리를 통합하면서 우리가 지구에 태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우주로서 육신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삶과 죽음의 여정을 시적으로 은유합니다.” 
 
롭 윈의 유리 조각과 조지 콘도의 회화작품이 어우러진 더페이지갤러리.

롭 윈의 유리 조각과 조지 콘도의 회화작품이 어우러진 더페이지갤러리.

개인적으로 아트페어의 매력은 김수자와 아니시 카푸어, 우고 론디노네와 김환기처럼 이미 작품성과 시장성에서 전 세계적으로 탄탄한 입지를 지닌 작가뿐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평가가 진행되고 있는 아티스트를 나만의 취향과 관점으로 발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키아프는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 16개의 솔로 부스를 선보였다. 조만간 인도네시아에 쇼룸을 낼 계획을 갖고 있는 백아트에서는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온 아트레이유 모니아가의 작품을 소개했다. 복잡하고 기이한 상징과 기호들이 불교 회화처럼 화면 전체를 화사하게 수놓는 모니아가 작품의 아름다운 기괴함은 작가가 고집하는 수채화의 특성에 힘입어 한껏 이국적인 색채를 띤다. 그 맞은편에 자리한 L.A 갤러리 메이크 룸에서는 한국 작가 유귀미의 작품을 선보여 완판을 기록했다. 갤러리 대표 에밀리아 인은 부스에 배치한 작품들의 절반은 한국 컬렉터들에게 갔다면서 “이들의 컬렉팅 열정이 마치 국가적 현상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능통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동시대 미술계의 문맥을 거침없이 탐색하고 애호와 소장에 관한 적극적인 실천력으로 무장한 ‘영 컬렉터’의 존재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마침 일상에서 마주한 자연을 동화적으로 담아낸 유귀미 작가의 보랏빛 그림을 소장하게 된 영 컬렉터는 카톡을 통해 “프리즈와 키아프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가중된 피로가 이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스르르 풀어졌어요. 그 기분 좋은 노곤함이 이 작품에 반했다는 확신을 줬어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9월 5일 월요일, 키아프는 단 하루의 관람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첫날 흰 벽을 가득 채웠던 갤러리신라의 바나나는 이제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화제를 모았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와 마르셀 뒤샹이 1백 년 전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하며 제기한 “작품 자체보다 미술가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문제적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익명의 아티스트 그룹 엘 그루포 엑스(El Groupo X)의 〈Banana is Banana…?〉. 이 ‘작품’의 완판은 옆 벽에서 진행한 갤러리신라의 장기 서베이 프로젝트 ‘The Price of Art is…?’와 함께 “예술과 상업성의 좋은 밸런스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어쨌거나 이번 페어가 한국 미술계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앞으로도 그 변화는 계속 될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전을 추구해야 할까?  
 
갤러리신라에서 익명의 아티스트 그룹 엘 그루포 엑스가 선보인 〈Banana is Banana...?〉.

갤러리신라에서 익명의 아티스트 그룹 엘 그루포 엑스가 선보인 〈Banana is Banana...?〉.

3층 프리즈가 폐막한 오후 5시, 아쉬움을 주체하지 못한 관람객들이 1층 키아프로 대거 이동한 그 시각, 제이슨 함 갤러리 부스에서 만난 제이슨 함 대표는 “지금까지 키아프는 ‘코리안 인터내셔널 아트페어’를 기치로 내걸고 페어를 꾸려왔는데 이 기회를 통해 진정한 ‘인터내셔널 아트페어’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키아프 대 프리즈, 한국 화랑 대 글로벌 화랑이라는 구도는 절대적으로 불필요합니다. 오직 키아프만이 갖고 있는 특별함으로 글로벌 미술 생태계 안에서 페어를 포지셔닝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봐요.” 다음 날 프리즈 서울의 필름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통인동 막집에서 만난 한 큐레이터도 연결선상에 있는 얘기를 했다. “프리즈와의 공동 개최를 무슨 신미양요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반쯤은 농담이지만.(웃음) 이번 페어는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이미 한국 미술계는 아티스트, 갤러리, 미술관, 컬렉터 등이 작품, 시스템, 전시, 컬렉팅의 애티튜드 그 모든 방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하는 요구에 당면했다고 생각해요.” 그 요구와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한국 미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일 것 같다. 2022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일어난 들불 같은 미술에 대한 열정이 볼품없이 꺼져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방향치로서 사방에 비슷한 크기의 부스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아트페어에 가면 여지없이 패닉에 빠지지만 돌다 우연히 만난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짜릿한 희열은 또다시 페어를 찾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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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안동선
    사진/ 홍원기, 페레스프로젝트, GOP, 더페이지갤러리, 키아프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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